
학창 시절 읽은 『프랑켄슈타인』은 '괴물 나오는 공포 고전' 정도로만 기억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다시 이 이야기를 마주하는 순간, 머리가 아니라 가슴 한가운데로 꽂혀왔습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이렇게까지 닮아 있을 줄은, 부모가 되기 전엔 몰랐습니다.
줄거리 — 생명을 만들고 버린 과학자의 이야기
『프랑켄슈타인』은 1818년 메리 셸리가 스물한 살에 발표한 소설입니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단순해 보입니다. 생명의 비밀에 집착한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시체의 조각들을 조합해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키지만, 그 흉측한 외형에 공포를 느끼고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세상에 혼자 내던져진 피조물은 언어를 배우고 인간 사회를 관찰하면서 조금씩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끝내 자신을 버린 창조주를 찾아가 하나뿐인 동반자를 만들어 달라고 간청하죠. 빅터가 이를 거절하면서 두 존재는 서로를 파멸로 이끄는 긴 추격전을 시작합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서사 구조가 있습니다. 원작은 월튼 선장의 편지, 빅터의 회고, 피조물의 독백이라는 세 겹의 액자 서술 방식(frame narrative)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액자 서술 방식이란 이야기 안에 또 다른 화자의 이야기가 중첩되는 구조인데, 덕분에 독자는 빅터와 피조물 양쪽의 시각을 동시에 들을 수 있습니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악당이 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제가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는 그저 '오만한 과학자가 천벌을 받는 이야기'로 읽었습니다. 피조물의 기괴함과 빅터의 집착이 주는 서늘한 분위기만 기억에 남았고, 두 인물 사이의 감정선은 사실 깊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 빅터 프랑켄슈타인: 생명 창조에 성공하지만 결과물의 외형을 보자마자 책임을 포기한 창조주
- 피조물(크리처): 버려진 채 세상을 독학으로 이해하고, 사랑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존재
- 메리 셸리: 당시 영국 낭만주의 시인들의 이중적 면모를 직접 목격하며 이 작품을 썼다는 점에서, 소설 자체가 일종의 고발문이기도 합니다
핵심 주제 — '아버지 역할'에 대한 강렬한 고발
『프랑켄슈타인』을 단순히 '과학 기술의 오만이 부른 비극'으로만 읽으면 절반밖에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메리 셸리가 이 소설을 쓴 배경을 알고 나면 주제가 훨씬 선명해집니다.
당시 그녀는 제네바 호수 인근에서 남편 퍼시 셸리, 그리고 당대 '천재'로 불리던 낭만주의 시인 로드 바이런과 함께 지냈습니다. 이 낭만주의(Romanticism) 시인들은 예술적 이상과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면서도, 정작 눈앞의 가족을 돌보는 일에는 철저히 무관심했습니다. 낭만주의란 이성 중심의 계몽주의에 반발해 감성·개성·자연을 앞세운 19세기 예술 사조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감성적'이어야 할 이 예술가들이 가장 가까운 사람의 감정에는 둔감했던 셈입니다.
퍼시 셸리의 전 부인이 아이를 임신한 채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건은 메리 셸리에게 깊은 흔적을 남겼을 것입니다. 그 경험이 빅터라는 인물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는 것, 부모가 된 뒤에야 비로소 느껴졌습니다.
소설 속 빅터는 생명을 창조하고 나서 그 결과물이 기대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책임을 내팽개칩니다. 이건 과학자의 실패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이가 원하는 모습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혹은 키우는 일이 상상보다 훨씬 고되다는 이유로 등을 돌리는 '준비되지 않은 부모'의 이야기입니다.
애착 이론(Attachment Theory)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영국 정신분석학자 존 볼비(출처: Simply Psychology — Attachment Theory)가 정립한 이론으로, 어린 시절 주 양육자와 형성하는 정서적 유대가 이후 인간관계 전반에 걸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입니다. 쉽게 말해, 어릴 때 충분히 안아주고 반응해 준 부모가 있었느냐 없었느냐가 그 사람의 내면 세계를 통째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의 폭주는 바로 이 애착 결핍의 극단적 형태로 읽힙니다.
아카데미 4관왕을 차지한 영화 「가여운 것들」 역시 같은 프랑켄슈타인 서사를 바탕으로 합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오래 머릿속에 남았던 장면은 마지막, 죽어가는 빅터의 손을 피조물이 자기 머리 위에 얹는 장면이었습니다. 평생 한 번도 쓰다듬어 주지 않은 손. 그 짧은 장면 하나가 두 인물이 나눈 모든 대사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깨달음 — 부모가 된 후에야 보이는 것들
아이를 낳기 전까지 저는 '애 낳아야 어른 된다'는 말을 솔직히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고생을 통해서만 성장한다는 뉘앙스가 불편했고, 꼭 그런 경험을 해야만 어른이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이와 낳고 키우면서, 그 말의 의미가 고생에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건 '자기 자신이 아닌 존재를 중심에 놓아본 경험'에 대한 이야기였던 겁니다.
부모가 된 뒤 다시 읽은 빅터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실패한 과학자가 아니라, 결과가 기대와 달라지자 곧바로 책임을 포기해버린 사람. 제가 이전에 그 지점을 못 봤던 건,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는 그 선택이 어떤 무게를 갖는지 체감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부모가 되는 시점이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이 아니라 '책임을 선택하는 순간'이라고 느낍니다. 처음엔 낯설고 어렵기만 했던 아이가, 함께 시간을 보낼수록 제 안에서 중심이 되어가는 걸 느꼈습니다. 일본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말하는 것처럼,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 부모와 자식 사이의 실질적인 연결고리가 된다는 것도 이제야 이해합니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건, 영화 「가여운 것들」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입니다. 아카데미 수상작답게 비주얼과 연기는 압도적입니다. 피조물의 두려움과 외로움을 눈빛 하나로 표현해낸 배우의 열연은 깊은 잔상을 남깁니다. 그러나 원작 소설이 가진 서늘한 심리적 긴장감과 두 인물 사이의 철학적 고뇌에 비하면, 영화는 시각적 스펙터클 쪽으로 무게 중심이 쏠려 있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원작의 무거운 부성 책임이라는 주제가 자극적인 사건 위주로 단순화된 점은, 고전의 깊은 독해를 기대한 쪽에서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부분입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 원작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면 오히려 그 간극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아이 양육에서 가장 어렵다고 느끼는 건 '정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싫다고 버티는 음식을 끝까지 먹여야 하는지, 아이의 의지를 어디까지 존중해야 하는지 — 이 회색 지대들이 사실 빅터가 맞닥뜨린 딜레마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결국 가장 어려운 선택지인 '책임지는 것'에서 도망쳤고, 그 도망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출처: WHO — Child Maltreatment에 따르면 아동기 방임은 신체적 학대 못지않게 심각한 정서적 손상을 남기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빅터의 방임이 허구로 끝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프랑켄슈타인 원작 소설은 어렵지 않나요? 읽을 만한가요?
A. 생각보다 어렵지 않습니다. 액자 서술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어 처음엔 구조가 조금 낯설 수 있지만, 피조물의 독백 파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속도가 붙습니다. 특히 부모가 된 분이라면 피조물의 감정선이 훨씬 직접적으로 와닿을 것입니다.
Q. 영화 「가여운 것들」이 프랑켄슈타인 원작과 많이 다른가요?
A. 설정과 비주얼은 많이 다릅니다. 원작의 심리적 긴장감보다 영화적 스펙터클에 집중하는 편이라 호불호가 갈립니다. 다만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책임과 방임이라는 핵심 주제는 충분히 담겨 있으니, 원작을 먼저 읽고 보면 더 풍부하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Q. 프랑켄슈타인이 AI나 기술 윤리 얘기라고 알고 있었는데, 아닌가요?
A. 기술 문명에 대한 경고로 읽히는 것도 틀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메리 셸리의 집필 배경과 소설 전체의 감정선을 따라가면, 이야기의 무게 중심이 오히려 '생명을 만든 자의 양육 책임'에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기술 윤리는 그 주제를 담는 그릇에 가깝습니다.
Q. 아이를 낳지 않아도 이 소설을 깊이 이해할 수 있을까요?
A. 물론입니다. 다만 '버려진 존재의 감정'은 누구에게나 공감의 통로가 될 수 있지만, 빅터 쪽의 감정 — 기대와 다른 결과 앞에서 느끼는 공포와 회피 — 은 실제로 양육 경험이 있을 때 더 입체적으로 읽히는 게 사실입니다. 그 차이가 소설의 두께를 결정짓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결론
『프랑켄슈타인』은 제가 학창 시절에 읽었을 때와, 부모가 된 뒤에 다시 읽었을 때 완전히 다른 소설이었습니다. 같은 문장인데 들어오는 깊이가 달랐고, 그게 솔직히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습니다. 내가 그동안 이 책을 표면만 읽어왔구나 싶었습니다.
빅터의 비극은 생명을 창조한 데 있지 않습니다. 창조하고 나서 책임을 지지 않은 데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이는 외형이나 기대치와 무관하게 존재 자체로 인정받고 사랑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 단순한 진리를, 이 외로운 피조물의 200년 된 울부짖음이 지금도 또렷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직 이 소설을 읽지 않으셨다면, 특히 부모이거나 부모가 될 예정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영화 「가여운 것들」을 먼저 본 뒤 원작을 찾아 읽는 순서도 좋습니다. 어느 쪽이든, 빅터와 피조물이 나누는 마지막 장면에서 전과 다른 무언가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